현대자동차그룹은 스타트업과의 협업을 통해 디지털, M·E·C·A, 로보틱스 등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2000년부터 CVC 활동을 펼쳤다. 현대차의 CVC 조직은 CVC팀, CorpDev팀, 제로원, 크래들 등 투자 목적에 따라 세분화됐고, 별도 법인이 아닌 현대차 오픈이노베이션본부 산하에 있다. 투자가 실제 사업으로 연계돼 오픈이노베이션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CVC팀은 물론 스타트업과 직접 협업하는 사업부, 재경·기획부서 등 전사가 CVC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현대차는 오픈이노베이션에 대한 경영진의 메시지 전달, KPI 설정, 연 2회 전사적 협의체 등 제도 마련으로 사업부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스타트업과 스파링 한다. 함께 사업을 진행하며 현대차는 미래 모빌리티에 필수적인 역량을 얻고, 스타트업은 투자와 고객을 얻는다.”
현대차에서 CVC팀을 이끄는 신성우 상무는 CVC 활동을 파트너와 경쟁과 성장을 함께하는 스파링에 비유합니다. 현대차는 자동차 산업에서 파괴적 혁신을 이끄는 스타트업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과 정면으로 부딪히며 발전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투자를 통해 스타트업과의 경기가 성사되면 협력 사업을 통해 부족한 점을 깨닫고 스타트업과 함께 보완해 나갑니다. 미래 모빌리티 산업의 핵심으로 꼽히는 Mobility(모빌리티)·Electrification(전동화)·Connectivity(연결성)·Autonomous(자율주행), 즉 M·E·C·A 및 로보틱스, UAM(Urban Air Mobility, 도심항공모빌리티), 수소 등에 역량을 가진 스타트업에 투자하며 협업의 가능성이 있다면 어떤 투자 단계에 있는 스타트업이든 상관없이 함께할 방법을 모색합니다.
현대차는 2000년부터 CVC 활동을 비롯해 사내 스타트업 등 오픈이노베이션을 시도했습니다. ‘인터넷이 자동차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라는 다소 막연한 가설에서 CVC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리고 2016년 이후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들을 통해 16년 전 가설이 검증됐고 이에 현대차의 CVC 활동 역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실리콘밸리, 텔아비브 등 스타트업들이 활약 중인 도시에서 현대차와 함께 스파링 할 스타트업을 발굴하기 위해 사무소를 개소했고 외부 기관과 공동으로 펀드를 조성해 운용하고 있습니다.
현대차는 CVC 활동에서 전사적 참여를 강조합니다. 아무리 좋은 스타트업을 찾아 투자해도 실제 사업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오픈이노베이션은 결실을 맺기 어렵습니다. 현대차에서 CVC 활동을 하는 조직들은 별도 법인이 아닌 현대차 내부에 하나의 팀으로 존재합니다. CVC 조직은 스타트업-현대차 사업부 사이의 퍼실리테이터로서 CVC 활동 전 과정에서 사업부와 긴밀히 소통합니다. 경영진 역시 오픈이노베이션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사업부의 CVC 참여를 독려합니다. 파괴적 혁신에 맞서기 위해 파괴적 혁신을 선도하는 스타트업과 스파링에 나선 현대차의 CVC를 DBR가 분석했습니다.
1. 실리콘밸리에서 불어온 오픈이노베이션의 바람
현대차그룹의 CVC 연대기는 2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는 인터넷의 부흥기입니다. PC가 보급되고 인터넷 망이 깔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 인터넷이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초창기 인터넷은 텍스트 정보를 주고받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베이 등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이커머스가 나타나며 인터넷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도 부풀었습니다. 당시 인터넷을 무기로 한 혁신을 이끌던 IT 벤처 육성은 정부의 주요 과제였고 나스닥, 코스닥 등 벤처 기업의 자금 조달을 위한 증권시장이 형성됐습니다.
현대차 역시 인터넷이 자동차에도 영향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벤처 생태계에 눈을 돌렸습니다. 현대차는 2000년 벤처 투자 전담 조직 ‘벤처플라자’를 설립해 스타트업 투자와 사내 스타트업 육성을 시작했습니다. 첫해에는 내비게이션 개발사, 사고기록장치개발사, 통합보안시스템 회사 등 12개 스타트업이 벤처플라자가 마련한 사무실에 입주했습니다. 현대모비스도 2001년 투자 전담팀인 ‘팰로앨토(Palo Alto)’팀을 꾸렸으며 자동차용 인터넷 단말기, 음성 기술, GPS 등 자동차 부품 관련 첨단 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에 투자했습니다. 2001년 벤처플라자와 팰로앨토팀은 현대차 산하 벤처플라자로 통합됐습니다.
2010년 이후 CVC를 출범한 GM, BMW, 도요타 등 경쟁사들에 비하면 10년 이상 앞선 선도적인 움직임입니다. 그러나 현대차의 CVC가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달렸던 건 아닙니다. IT에 대해 한껏 부푼 사람들의 기대감은 이내 거품으로 판별됐습니다. 스타트업에 흐르던 자금이 뚝 끊기며 창업 시장은 빙하기에 접어들었습니다. 현대차에서도 사내 공모로 투자할 스타트업을 모집했지만 마땅한 자격을 가진 스타트업이 없어 성에 안 차는 회사까지 억지로 선발해야 할까 고민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기대보다 못한 성과가 뒤따르기도 했지만 경영진은 스타트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CVC 조직의 내실을 닦는 시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CVC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다행히 가시적인 성과들도 나타났습니다. 내비게이션을 통해 자동차에 디지털 기능을 추가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후속 투자를 진행한 내비게이션 개발사 엠엔소프트가 2005년 현대차그룹의 계열사로 편입됐습니다. 현대차의 내비게이션 프로그램 ‘맵피’와 기아차의 ‘지니’가 엠엔소프트의 작품입니다. 2011년 현대엠엔소프트로 개명했으며 2021년에는 현대차그룹의 핵심 소프트웨어 회사 중 하나로 인정받아 현대오트론, 현대오토에버와 함께 현대오토에버로 통합됐습니다.
현대차그룹의 CVC 활동은 실리콘밸리로부터 시작된 모바일 혁신을 계기로 급물살을 탔습니다. 2010년 전후로 닷컴버블에서 살아남은 애플, 아마존, 구글 등 실리콘밸리의 테크 벤처들이 스마트 디바이스와 플랫폼을 주축으로 전통 제조 기업들을 앞지르기 시작하며 다시금 전 세계적인 창업 열풍이 일어난 것입니다. 전 세계의 혁신이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한다는 신호가 형성되자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실리콘밸리에 사무소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차 역시 실리콘밸리의 모바일 혁신이 모빌리티로까지 이어질 것이라 전망하며 2011년 실리콘밸리 사무소 ‘현대벤처스(現 크래들)’를 열어 실리콘밸리의 벤처들과 협업에 나섰습니다.
2016년 이후에는 우버, 테슬라, 구글 등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이 M·E·C·A로 요약되는 미래 자동차 산업의 혁신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현대차의 라이벌이 다른 완성차 기업이 아니라 테크 기업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현대차 내부와 언론을 통해서 전달됐습니다. 그러나 15년 넘게 스타트업과 협업하며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고자 했던 현대차에도 테크 기업이 주도하는 모빌리티 혁신은 갑작스러운 변화였습니다. 자동차의 5대 성능으로 꼽히는 구동·제동, 승차감·핸들링, 진동·소음, 충돌·안전, 내구를 높이기 위한 기계공학 기술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IT로는 테크 기업들을 따라잡을 순 없었습니다. 외부에서 인재를 영입해 역량을 처음부터 다져 나가기엔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이 성장하는 속도가 너무 빨랐습니다. 전사적으로 오픈이노베이션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오픈이노베이션본부가 신설됐고 산하에 CVC팀, 크래들, 제로원 등 스타트업에 투자를 진행하는 조직들이 포함됐습니다.
2. 사업부가 적극 참여하는 CVC
이처럼 현대차에서 CVC 활동을 하는 조직들은 오픈이노베이션본부 내에 팀으로 존재합니다. CVC 활동을 위해 별도 법인으로 설립된 롯데그룹의 롯데벤처스, 호반그룹의 플랜에이치벤처스와는 대비되는 지점입니다.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조직이 기업 내부에 있으면 투자를 활발히 진행하는 데 제동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의사결정 과정이 복잡해지며 규모 확장이나 인재 영입에도 어려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현대차가 CVC 조직을 내부에 둔 것은 사업부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사내에서 사업 또는 기술을 개발하는 조직이 CVC를 포함한 오픈이노베이션에 배타적인 건 당연한 일입니다. 내부에서도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데 외부 역량을 끌어오겠다는 시도는 자칫 내부 조직에 ‘밥그릇 뺏기’로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재무적 투자가 목표였다면 좋은 스타트업을 찾아 수익만 실현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현대차는 전략적 투자가 목표였기에 투자가 실제 사업으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CVC 조직이 외부에 존재하면 사업부의 긴밀한 참여를 독려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워집니다. 신 상무가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의 CVC 담당자들도 “독립적으로 투자를 집행 중인데 본사에서 진행되는 사업으로까지 연결이 되지 않는다”며 푸념을 늘어놓곤 했습니다.
현대차는 현업 사업부와 온몸으로 부대끼며 CVC 참여를 이끄는 길을 택했습니다. 처음부터 사업부가 우호적으로 CVC 활동에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경영진이 오픈이노베이션에 대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하자 차츰 CVC에 대한 사업부의 분위기가 바뀌어 나갔습니다. 2016년에는 경영진 차원에서 전사 회의를 소집해 테슬라, 우버 등 스타트업이 모빌리티 생태계의 혁신을 주도하는 상황을 지적했고 이와 연계해 내부 신사업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강조했습니다. 2014년 이후부터는 임원들이 실리콘밸리 크래들을 탐방하기 시작했고, 2018년에는 사내의 모든 본부장이 1주일간 이곳을 방문해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혁신 기술과 일하는 방식을 배웠습니다. 1주일 동안 모든 본부장이 자리를 비운다는 건 국내에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본부장이 아무도 없다는 뜻으로 큰 리스크가 따를 수 있습니다. 그만큼 경영진이 오픈이노베이션에 ‘진심’이라는 신호로 비쳤습니다.
이처럼 경영진이 스타트업과 신사업에 대한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하자 사업부에서도 CVC 활동을 중요하게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CVC팀이 사업부에 먼저 스타트업과 협업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는 게 일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사업부의 반대가 없으면 투자가 진행됐습니다. 현재는 사업부가 먼저 CVC팀에 협업하고 싶은 스타트업에 투자하자고 제안하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CVC팀이 검토하는 투자 건수가 크게 늘었고, 면밀하게 검토한 끝에 사업부의 제안을 반려하는 일도 생기고 있습니다.
CVC 활동을 적극적으로 독려하기 위한 제도도 마련했습니다. 스타트업과의 협업을 사업부의 KPI 중 하나로 설정한 것입니다. 연 2회 11개 그룹사의 125개 팀이 모여 그룹사에 필요한 기술적 역량에 대해 논의하는 전사적 협의체도 운영합니다. 투자가 진행되면 협업을 같이할 사업부와 재경, 기획, 구매 등 신사업과 자금 운영과 관련된 부서가 모두 참여해 과거 투자 사례, 투자 이후 스타트업 육성 방안, 재무적 타당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합니다. 신 상무는 “실제 투자가 진행되기 이전부터 유관 사업부와 긴밀한 논의가 이뤄진 덕분에 실제 70% 이상의 투자가 개념 검증(PoC, Proof of Concept), 마켓 센싱 등 단기적인 목표 달성으로 이어진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목표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사례들에 대해서는 케이스 스터디를 진행하며 CVC 제도들을 개선해 나가고 있습니다. KPI로 설정하면 특정 활동에 첫발을 들이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KPI가 구체적이지 않다면 ‘한 발만 걸치기’식의 활동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현대차 CVC팀도 한 사업부로부터 ‘투자 건수 자체가 KPI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스타트업과 딱히 원치 않았던 협업을 진행했다’는 솔직한 피드백을 받고 협업 의도, 방식 등 정성적인 내용을 KPI에 적용하는 방법을 고안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공장에 바로 기술을 활용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이후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예상보다 부족하거나 스타트업과의 합의점을 찾지 못해서 협업이 어그러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현장에 스타트업의 기술을 바로 적용하기보다는 세부 요인을 보다 세세히 점검하는 ‘버퍼’를 마련해야 실패를 줄일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이같이 실패 사례로부터 얻은 인사이트는 사업부에도 전달돼 사업부에서도 CVC 활동에 대한 이해를 높여나가고 있습니다.
3. 조직 세분화해 전방위 스타트업에 투자
현대차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시리즈의 스타트업에 투자하며 구체적인 투자 목적에 따라 CVC팀, CorpDev팀, 제로원, 크래들 등 전담 조직이 분리돼 있습니다. CVC팀은 현대차 본 계정을 통해 주로 시리즈 A 이상의 스타트업에 전략적 투자를 합니다. 현대차 사업부 내에서 스타트업과의 협업 니즈를 발굴해 실제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로 연결하는 게 CVC팀의 핵심적인 역할입니다. CorpDev팀은 시리즈 D 이후에 회사의 정체성이 확립된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JV를 설립하거나 인수합병(M&A)을 추진합니다.
2018년 출범한 창의 인재 육성 및 오픈이노베이션 플랫폼 제로원은 당장은 협업하기 어렵더라도 잠재적인 가능성이 있는 스타트업을 센싱(sensing) 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로 시드∼시리즈 B의 스타트업에 투자합니다. 사내 벤처를 전담하는 벤처사업개발팀이 액셀러레이터 역량을 확보하게 되면서 외부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까지 진행하게 됐습니다. 본 계정으로 투자를 집행해 소액이라도 재경, 구매 등 유관 부서의 엄밀한 검토가 이뤄지는 CVC팀과는 달리 제로원은 펀드를 조성해 20억 원 미만의 투자에 대해서는 자체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립니다. 2018년 현대차가 100억 원을 단독으로 출자해 제로원 1호 펀드를 조성했습니다. 2021년 제로원 2호 펀드에는 현대차와 더불어 산업은행·신한은행 등 금융사, 현대모비스·이노션 등 그룹사, 만도·동희 등 협력사 등이 참여해 805억 원의 자금을 모았습니다. 제로원은 액셀러레이터로서 신사업 및 신기술 개발 협업 지원, TIPS 등 정부 지원 사업 연계 등 스타트업 육성 활동도 전개하고 있습니다. 작가, 디자이너, 엔지니어 등을 대상으로 창작 프로젝트를 지원하며 신기술의 활용 방안을 예술적 접근을 통해 탐구하기도 합니다.
글로벌 오픈이노베이션은 크래들이 담당합니다. 크래들(CRADLE)은 ‘Center for Robotic-Augmented Design in Living Experience’의 약자인 동시에 ‘스타트업의 요람’을 뜻한다. 기술적 강점을 가진 전 세계의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있습니다. 2007년 아이폰이 세상에 처음 나오고 실리콘밸리에서 모바일 혁신 기술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현대차 역시 혁신 기술 트렌드를 센싱 하고, 허무맹랑해 보이는 아이디어도 적극적으로 실험해 보는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의 기업가정신을 배우기 위해 2011년 실리콘밸리에 첫 크래들을 열었습니다. 이후 2018년 이스라엘 텔아비브, 독일 베를린, 2019년 중국 베이징, 2021년 싱가포르에도 크래들을 설립했습니다. 다소 괴짜 같은 아이디어를 가진 스타트업들이 가능성을 실험해 보기 위해 실리콘밸리에 모였다면 상대적으로 자동차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AI, 센서 등의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들은 텔아비브에 많습니다. 자동차 산업의 전통 강자인 독일에서는 모빌리티, 스마트시티 분야에서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이 나타났습니다. 수소 생태계가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점 역시 베를린 크래들이 개설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베이징 크래들은 중국 시장의 파트너를 물색하고, 싱가포르 크래들은 난양공대(NTU)와 산학 과제를 수행하며 미래 기술을 확보합니다. 제로원 역시 크래들의 서울 사무소 역할도 수행합니다. 각 크래들은 설립 취지에 맞게 전 세계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협업 및 투자 기회를 물색하며 CVC팀과 함께 스타트업에 투자를 진행합니다.
현대차는 현재까지 본 계정을 통해 약 121건의 투자를 집행했습니다. 건당 30억∼100억 규모이며 스타트업 규모에 따라 몇백억 단위의 투자도 이뤄집니다. 제로원 펀드를 통해서는 61건, 해외 대학 혹은 타 VC와 공동으로 운용하는 Co-GP 펀드를 통해서는 36건의 투자를 진행했습니다.
현대차는 M·E·C·A와 로보틱스, UAM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에 주목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운드하운드(SoundHound)’를 꼽을 수 있습니다. 사운드하운드는 2006년 설립된 미국의 음성인식 및 자연어 처리 기술 회사입니다. 2011년 차량용 음성인식 기술은 애플의 음성인식 AI ‘시리’를 만든 ‘뉘앙스커뮤니케이션스(Nuance Communications)’가 꽉 잡고 있었습니다. 현대차는 이미 완성된 뉘앙스의 기술을 적용하기보다는 기술이 만들어지는 단계에서부터 현대차에 적합한 음성인식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사운드하운드에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사용자가 멜로디를 흥얼거리면 노래를 찾아주는 게 당시 사운드하운드의 주요 서비스였으나 현대차와의 협업을 거치며 점차 차량용 솔루션을 개발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사운드하운드의 강점은 여러 가지 요구가 섞인 복잡한 명령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 음성인식 AI는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하고 내용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 사용자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사운드하운드의 음성인식 AI는 텍스트 변환 과정 없이 음성을 바로 이해해 복잡한 명령도 빠르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즉, 운전자들은 AI에 정확한 명령을 내리기 위해 단문을 사용하는 등 의식적인 활동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매끄러운 연결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운드하운드의 음성인식 기술은 현대차의 북미, 인도 제품에 실제 적용됐고, 벤츠 또한 사운드하운드의 음성인식 기술을 활용합니다. 사운드하운드는 유니콘으로 성장했으며 올해 4월 기업인수목적회사(SPAC)를 통한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습니다.
전동화를 위해선 ‘꿈의 전지’라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와 친환경 에너지로 꼽히는 수소 관련 스타트업에 투자합니다. 두 기술 모두 상용화에 앞서 적극적으로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단계로 어떤 기술적 강점을 가진 회사가 시장의 주도권을 잡게 될지 가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회사에 집중해서 투자하기보다는 여러 업체에 투자해 다양한 가능성을 대비합니다. 예컨대, 전고체 배터리는 사용되는 전해질 재료에 따라 안정성, 비용 등이 달라집니다. 전기차에는 주로 황화물 전고체 배터리가 활용될 것으로 전망되며 현대차는 그 재료가 되는 황화물 전해질을 개발하는 미국의 벤처 ‘솔리드파워(Solid Power)’에 투자했습니다. 황화물은 이온 전도도가 높고 안전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수분에 영향을 많이 받고 주원료인 황화리튬의 가격이 비싸다는 점이 극복해야 할 과제로 꼽힙니다. 현대차는 전고체 배터리의 또 다른 재료인 고분자 전해질을 개발하는 미국 ‘아이오닉머터리얼스(Ionic Materials)’에도 투자를 진행했습니다. 고분자는 황화물보다 공정성이 우수하고 소재 원가가 낮지만 안전성 측면에서 개선이 필요합니다.
수소의 경우 수소 생산부터 관련 사업에 이르기까지 수소 공급망 전 과정에 위치한 글로벌 스타트업에 투자합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기업, 학교 등과 파트너십을 맺어 공동으로 투자를 진행하거나 사업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수소가 상용화되기 위해서는 수요와 공급이 함께 늘어 규모의 경제를 통한 생산 비용 절감이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선 여러 기업의 선제적인 투자가 필수적입니다. 현대차는 사우디 국영 석유 기업 아람코(Aramco)와 수소 생산, 저장, 운송, 충전 등 수소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습니다. 스위스 수소 기업 H2 Energy와는 수소를 활용하는 연료전지(Fuel Cell) 트럭 공급 합작법인 HHM(Hyundai Hydrogen Mobility)을 설립해 유럽에서 연료전지 트럭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중국 칭화대와 수소 에너지 펀드를 조성해 한국과 중국 등 수소 관련 스타트업에 투자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기술뿐 아니라 시장의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한 CVC 활동도 진행합니다. 현대차는 대출 비교 플랫폼 ‘핀다(Finda)’에도 투자했습니다. 수익성이나 플랫폼 기술보다는 소비자들이 디지털 금융 상품에 어떻게 반응하고 이들의 지불 능력이 얼마 정도인지 등을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현대차는 핀다와 함께 현대차의 커넥티드 카 전용 디지털 금융 대출 상품 ‘커넥티드 카 1Q 오토론’을 출시했습니다. 업계 최초의 비대면 자동차 금융 상품이며 향후 주행거리, 운전 습관 등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금융 상품의 출시도 준비 중입니다.
이처럼 스타트업과의 다양한 협업을 통한 전략적 투자가 돋보이지만 재무적 성과가 뒤떨어지는 건 아닙니다. 현대차가 투자한 스타트업 중 IPO(기업공개)에 성공한 기업은 2020년 1개, 2021년 6개, 2022년은 5월 말에 이미 3개에 달합니다. 지속적인 협업을 위해 엑시트 하지는 않았지만 기업 가치가 한때 250배까지 늘어난 스타트업도 있습니다. 신 상무는 “현재까지 투자금 대비 수익이 3배 정도로 일반적인 VC와 견줄 만한 수준”이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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