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법엔 ‘친족상도례’란 제도가 있습니다. 직계혈족, 배우자, 동거가족 간 특정한 재산범죄(절도, 사기, 공갈, 횡령, 배임 등)는 피해자 의사와 관계없이 처벌치 않고, 그 외의 친족들 간 재산범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처벌하는 제도인데요.
방송인 박수홍 씨가 가족으로부터 횡령을 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제도가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위 사건을 접하고서는 ‘아무리 가족 간에 발생한 재산범죄라 하더라도 피해자 의사와 관계없이 이를 처벌하지 않는 건 부당하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형법
제328조(친족간의 범행과 고소) ①직계혈족, 배우자, 동거친족, 동거가족 또는 그 배우자 간의 제323조의 죄는 그 형을 면제한다.
②제1항 이외의 친족 간에 제323조의 죄를 범한 때에는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알려진 바와 다르게 법원에서도 가족 간 재산범죄에 친족상도례를 적용치 않고 처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무단으로 다른 가족의 계좌에서 자신의 계좌로 돈을 이체하거나, 다른 가족의 카드와 통장을 들고 현금이나 수표를 인출한 상황입니다. 이 경우 법원은 피해를 입은 ‘가족’뿐 아니라 그 가족의 계좌를 관리하는 ‘은행’도 피해자라고 보기 때문에 친족상도례를 적용하지 않습니다.
아래는 손자가 할아버지 통장을 무단으로 들고 가 ATM에서 할아버지의 예금 잔고를 본인 계좌로 이체한 사건인데요. 이때 피해자를 ‘할아버지’로 보면 친족상도례에 의해 그 직계혈족인 손자는 처벌되지 않지만, 대법원은 ’할아버지 예금 계좌를 관리하는 은행‘을 피해자로 보면서 손자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대법원 2007. 3. 15., 선고, 2006도2704, 판결
..(중략) 친척 소유 예금 통장을 절취한 자가 그 친척 거래 금융기관에 설치된 현금자동지급기에 예금 통장을 넣고 조작하는 방법으로 친척 명의 계좌의 예금 잔고를 자신이 거래하는 다른 금융기관에 개설된 자기 계좌로 이체한 경우, 그 범행으로 인한 피해자는 이체된 예금 상당액의 채무를 이중으로 지급해야 할 위험에 처하게 되는 그 친척 거래 금융기관이라 할 것이고, 거래 약관의 면책 조항이나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법리 적용 등에 의하여 위와 같은 범행으로 인한 피해가 최종적으로는 예금 명의인인 친척에게 전가될 수 있다고 하여, 자금이체 거래의 직접적인 당사자이자 이중지급 위험의 원칙적인 부담자인 거래 금융기관을 위와 같은 컴퓨터 등 사용사기 범행의 피해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위와 같은 경우에는 친족 사이의 범행을 전제로 하는 친족상도례를 적용할 수 없다.
손자가 할아버지 소유 농업협동조합 예금 통장을 절취하여 이를 현금자동지급기에 넣고 조작하는 방법으로 예금 잔고를 자신의 거래 은행 계좌로 이체한 사안에서, 위 농업협동조합이 컴퓨터 등 사용사기 범행 부분의 피해자라는 이유로 친족상도례를 적용할 수 없다고 한 사례
한편, 남편이 아내의 현금 카드를 몰래 가지고 나와 ATM에서 돈을 인출한 사안도 친족상도례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 역시 피해자를 ‘아내’로 보면 친족상도례에 의해 그 배우자인 남편은 처벌되지 않지만, 대법원은 ‘ATM 관리자’를 피해자로 보면서 남편에게 유죄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대법원 2013. 7. 25. 선고 2013도4390 판결
원심은, 이 사건 공소사실 중 ‘피고인이 B의 현금카드를 몰래 가지고 나와 2012. 3. 12. 07:30경 농업협동조합 상계5동지점이 관리하는 현금인출기에 위 현금카드를 집어넣고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 현금 500만 원을 인출하여 절취하였다’는 부분에 대하여, 피해자 B는 범행 당시 피고인의 배우자였던 사실이 인정된다는 이유로 형법 제344조(원심판결의 ‘제354조’는 오기로 보인다), 제328조를 적용하여 형 면제의 판결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절취한 현금카드를 사용하여 현금자동인출기에서 현금을 인출하여 취득하는 행위는 현금자동인출기 관리자의 의사에 반하여 그의 지배를 배제하고 그 현금을 자기의 지배하에 옮겨 놓는 것이 되어 절도죄가 성립하고, 여기서의 피해자는 현금자동인출기 관리자라 할 것이다(대법원 2009. 7. 9. 선고 2009도3681 판결 등 참조).
그럼에도 원심은 이 사건 공소사실 중 절도의 점에 대하여 그 피해자를 현금자동인출기 관리자가 아닌 카드명의자인 B로 보아(더구나 공소장 기재에 의하더라도 검사가 이 부분 공소사실에서 피해자를 B로 특정하여 기소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이를 전제로 친족상도례를 적용하여 형 면제를 선고하였으므로, 원심판결에는 절도죄의 피해자 및 친족상도례의 적용범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 이를 지적하는 상고이유의 주장은 이유 있다.
결국 가족 간 재산범죄라도 언제나 친족상도례가 적용되는 건 아니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가정의 달인 5월을 맞이하여, 가족 구성원들끼리 더욱 존중하며 기본적인 선을 지킬 수 있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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