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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New Art Gallery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feat. 에두아르 마네와 빈센트 반 고흐)

by MINGFORMATION 2024.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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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feat. 에두아르 마네와 빈센트 반 고흐)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feat. 에두아르 마네와 빈센트 반 고흐)

 

1.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1863년, 미술계에는 두 가지의 큰 사건이 일어났다. 낭만주의 회화를 탄생시킨 들라크루아의 사망과 앵그르가 주도하는 살롱전 심사에서 벌어진 소동이 그것이다. 소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살롱전 심사는 너무나 편파적이었고 평가의 공정성이 떨어졌다. 자신의 제자에게 유리한 점수를 주는 심사위원에 의해 입선하는 화가가 많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아름다움을 표현한 아카데미풍의 작품이 아니면 입선도 어려웠다. 결국 이런 관행에 환멸을 느낀 심사위원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전보다 훨씬 더 엄격한 기준으로 출품작을 평가했는데, 살롱전에서 낙선한 4천여 점의 작품 중에는 마네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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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두아르 마네

살롱전의 결과는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 3세는 낙선한 4천여 점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하고 거기에 ‘낙선자 미술 전시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편, 살롱전의 심사위원들은 자신들의 불공정성이 대중에게 알려질까 전전긍긍했다. 대중들이 낙선한 작품의 가치를 높게 보고 낙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심사위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형편없는 작품을 제일 잘 보이는 위치에 걸어 놓았는데, 그 치욕스러운 영광을 차지하게 된 작품이 바로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풀밭 위의 점심>이다.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보면 별 이상할 것도 없지만 당시에는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폴레옹 3세는 ‘음란하다’는 이유로 이 그림에 대한 불쾌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냈고 파리의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그 많은 누드 작품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왜 하필 이 작품을 ‘음란하다’고 했을까? 그 원인은 누드의 주체에 있다. 이전에는 신화에 나오는 여신들만이 그림에 누드로 등장했지만 마네의 작품에 나오는 누드 여인은 신화 속 여신이 아니라 일개 매춘부다. 그것도 두 명의 신사들 사이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앉아 있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거부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또한 그림 속의 여인은 지나치게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데, 기존의 그림들이 ‘순결하고 자연적인’ 표현을 위해 여신의 나체를 옅은 갈색으로 표현한 것에 비하면 매우 눈에 띄는 표현이었다. 그러니 그림이 더 외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네는 “나는 반드시 화가 자신이 속한 시대에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마네의 사실주의적 입장을 확실하게 대변하는 발언이었다. 사실주의 화가들은 눈으로 본 현실을 그리며 거기에 결코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지 않았다. 흔히들 현대 회화가 마네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는 이유가 그가 회화 자체의 순수성을 찾았다는데 있다. 마네는 밀레와 달리 회화를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밀레의 작품에서는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농민들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는 데 반해 마네의 작품에서는 화가의 숨은 의도를 느낄 수가 없다.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feat. 에두아르 마네와 빈센트 반 고흐)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feat. 에두아르 마네와 빈센트 반 고흐)

 

3. 빈센트 반 고흐

‘후기인상파’는 인상파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인상파와는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고, 시대상으로 볼 때도 ‘후기’라는 이름에 적합하다.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네덜란드 남부의 브라반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고흐가 자신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기법 면에서 미숙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고흐의 운명을 바꿔놓은 작품으로 인상파와 교류하기 전에 그린 가장 중요한 작품이기도 하다. 비록 사람들이 너무 붙어 있어 원근법 표현에는 문제가 있지만 그 안에는 고흐의 주관적인 정서가 배어 있다. 고흐는 현실주의가 중시한 ‘냉정한 방관자’ 역할에 얽매이지 않았다. 이 그림을 본 관람객들은 비참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가족들이 어쩌면 저렇게 침착하고 평온할 수 있는지 인생과 운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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