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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New Art Gallery

오랑주리(Orangerie) 미술관 - 오렌지 온실에서 미술관으로, 전환기 프랑스 미술의 전당

by MINGFORMATION 2023.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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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주리(Orangerie) 미술관 - 오렌지 온실에서 미술관으로, 전환기 프랑스 미술의 전당
오랑주리(Orangerie) 미술관 - 오렌지 온실에서 미술관으로, 전환기 프랑스 미술의 전당

 

1. 오랑주리(Orangerie) 미술관 - 오렌지 온실에서 미술관으로, 전환기 프랑스 미술의 전당

파리의 튀일리궁 정원을 장식하는 오렌지 나무들을 겨울 동안 옮겨 보호하라는 나폴레옹 3세의 명령에 따라 1853년에 지어진 오랑주리는 1921년 미술관으로 탈바꿈되었다. 개관 당시 오랑주리가 내건 취지는 동시대 활동 중인 예술가들의 그림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화가들은 이미 오래전 고인이 되었고, 그들의 작품들 또한 이제는 미술사의 고전이 되었다.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 오랑주리는 오르세와 미술가들이 이따금 겹치는데, 특히 인상파 화가들의 경우가 그렇다. 공간의 규모나 전시품의 숫자를 생각했을 때 오르세가 대저택, 오랑주리는 그 옆의 아담한 별채쯤 된다. 그러나 때로는 별채가 본채보다 더 편안하고 즐거운 장소일 수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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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원히 울려 퍼질 백조의 노래 - <수련> 연작(<아침> <버드나무의 아침>)

오랑주리 미술관을 대표하는 간판 화가, 터줏대감은 역시 원조 인상파의 영수 모네다. 그의 그림은 오르세에도 많이 전시되어 있지만, 특히 오랑주리에 있는 모네의 작품들은 비단 개인의 예술적 성취뿐 아니라 인상주의 운동, 나아가 근대 유럽 미술사의 한 챕터를 마무리하는 듯한 무게감과 존재감을 뿜어낸다. 어떤 의미에서 오랑주리는 모네의 예술에 바친 영예의 전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네는 당대 프랑스 화가들 가운데서도 상당히 장수했다. 86세까지 살다 보니 인상주의 운동이 신고전주의에 도전하는 아방가르드 세력이었던 시절을 한참 지나다 못해, 그 인상주의가 도리어 신진 화가들의 기세에 밀려 구시대의 유물 비슷하게 취급받는 역전의 상황까지 모두 지켜봐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시대에 뒤떨어진 한물간 화가로 찌그러져 있지 않았고, 마지막 남은 예술혼을 불사르며 걸작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물이 현재 오랑주리에 잘 보존되어 있다.

 

노년의 모네는 시력이 약화되고 여러 건강 문제에 우울증까지 겹쳐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다. 그런 그를 다시 창작 활동으로 몬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 모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재개하여 사망 직전인 1926년까지 총 8점의 초대형 그림을 그렸다. 엄청난 수의 사상자를 낸 전쟁이 끝난 며칠 뒤, 모네는 당시 프랑스 수상으로 평소 친분이 있던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고 평화를 기리는 마음에서 전쟁 동안 그린 자신의 그림들을 국가에 기증하고 싶다는 편지를 썼다. 클레망소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장소 선정과 비용 문제 등으로 그림들은 모네 사후인 1927년에야 겨우 오랑주리에서 시민들에게 공개될 수 있었다.

영원히 울려 퍼질 백조의 노래 - &amp;lt;수련&amp;gt; 연작(&amp;lt;아침&amp;gt; &amp;lt;버드나무의 아침&amp;gt;)
영원히 울려 퍼질 백조의 노래 - <수련> 연작(<아침> <버드나무의 아침>)

이렇게 모네가 국가에 바친 것은 다름 아니라 물과 꽃을 묘사한 그림들이었다. 더 정확히는 자택 정원에 있는 연못 위를 떠다니는 수련을 그린 것인데, 흔히 이 그림들은 <수련 연작>으로 불린다. 사실 모네는 그 시점까지 30년간 수련을 그려 왔지만, 그가 1차 대전 직후 국가에 헌납한 8점의 유작은 <수련 연작>의 피날레를 이룬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그리려는 대상과 빛이 이루어 내는 충돌과 조화에 몰두했던 모네의 기법은 오랑주리의 <수련 연작>에 이르러서는 아예 화면에 등장하는 형태와 색깔, 구도 등을 자유자재로 뒤섞고 해체했다가 다시 모이도록 하는 경지에 다다르고 있다.

 

빛을 한껏 받아들였다가 다시 뿜어내는 연못, 수면 위에 비치는 푸른 하늘을 고스란히 담아낸 그림 등은 거꾸로 걸어 놓아도 알아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혹은 이따금 거꾸로 걸어 놓고 보아야 그림의 참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명암과 형태가 모호하다. 비평가들이 이 그림들을 추상 미술의 전조로 거론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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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화가는, 야외에서 캔버스를 펼쳤다가도 구름이 잠시 태양을 가리기라도 하면 더는 붓을 놀리지 못하고 다시 햇볕이 날 때까지 기다렸다는 일화로 유명한 ‘젊은 시절의 모네’가 아니다. 빛을 기다리기보다는 마음 내키는 대로 빛을 만들어 내는 대가의 내공이 느껴진다. 어쩐지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라는 성경 창세기의 구절이 연상될 정도다. 연작 그림 속의 깊고 그윽한 물과 풀잎의 이미지 또한 창세기 속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등의 문장과 연결되는 면도 없지 않다.

 

또는 지구 역사에서 생명의 탄생을 위한 준비 과정이 분주하게 진행되던 원시의 바다, 그 정적과 정열이 함께하는 세계를 떠오르게도 한다. 화가의 그림에 천지창조의 순간을 연결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예술가는 자기 작품에 관한 한 창조주이니 무리한 비유도 아니라고 본다. 영어에는 ‘백조의 노래’라는 표현이 있다. 백조는 죽기 직전 단 한 번 아름다운 소리로 운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말로, 대개 어떤 사람이 마지막으로 이루어 낸 업적, 유종의 미를 거둔 성공을 일컫는다. <수련 연작>은 문자 그대로 모네가 부른 백조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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