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셔널 갤러리 - 양보다 질, 소수 정예 군단
내셔널 갤러리, 즉 ‘국립 미술관’은 1824년 영국 정부가 기업인이자 미술 애호가였던 앵거스틴의 유족들로부터 구입한 30여 점의 회화를 일반 시민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그 시원이다. 현 위치에 제대로 된 미술관 건물이 들어선 것은 1838년의 일이며 이후 수차례에 걸친 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름 속 ‘국립’이 주는 인상과는 달리 오늘날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한 미술품은 2,000여 점이 조금 넘는 수준이라, 여타 세계 유수의 미술관들에 비하면 내셔널 갤러리는 그야말로 새 발의 피 수준이지만, 역시 문제는 양보다 질이다. 기본적으로 15세기부터 19세기말까지의 유럽 회화를 보유하는 것을 정책으로 삼는 내셔널 갤러리의 컬렉션 가운데는 내로라하는 아티스트들의 대표작급 걸작들이 차고 넘친다. 그야말로 ‘소수 정예’라는 표현이 딱 맞다. 나는 지금까지 내셔널 갤러리를 세 차례 가 봤지만 갈 때마다 매번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한 새로운 그림을 마주하고 감탄하곤 했다.
2. 국가 원수의 위엄, 화가의 장인 정신 - <레오나르도 로레단 총독>
내셔널 갤러리를 방문한 사람마다 개인적 경험이야 다 다르겠지만,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림이라면 주저 없이 <레오나르도 로레단 총독> 초상화를 먼저 꼽겠다. 비록 세로 61.4센티미터, 가로 44.5센티미터의 아담한 규격이지만 이 작은 그림이 뿜어내는 포스는 웬만한 대형 초상화 못지않다. 왜 그럴까? 일단 그림 속의 주인공이 ‘한 나라의 군주’라는 사실이 주는 아우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레오나르도 로레단은 1501년부터 1521년까지 베니스 공화국을 다스린 총독이었다. 베니스는 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총독들이 다스린 나라다. 다만 총독직은 세습제가 아니라 선거로 뽑는 자리였기 때문에 새로운 총독 선출을 둘러싼 명문 귀족 가문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합종연횡이 항상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모델의 외모’다. 그림 속의 로레단 총독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다. 장년에 접어든 것이 분명함에도 햇볕에 노출될 기회가 별로 없었음을 시사하는 깨끗한 피부는 그가 명문 귀족 출신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입을 굳게 다문 표정은 희로애락 가운데 그 어떤 감정과도 거리가 있다. 그림은 로레단이 총독에 오른 1501년경에 제작된 것인데, 막 대권을 차지한 직후라면 으레 드러날 법한 자신감이나 만족감은 감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은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잔뜩 들어 복잡한 한 인간의 내면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해 집단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고도의 정치력을 요구했던 총독이라는 지위에 오른 인물이 장차 어떻게 베니스를 강대국들의 입김으로부터 지켜 내고 계속 번영하도록 다스려 갈 것인가 고뇌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비단 표정이나 생김새뿐 아니라 로레단 총독의 ‘독특한 복장’도 눈길을 끄는 요소다. 일단 총독이 머리에 쓴 모자는 코르노(corno)라고 불리는데, 어휘는 원뿔, 고깔과 같지만 동시에 크라운(crown), 즉 왕관과도 비슷한 어감인 것은 우연만이 아니다. 하얀 바탕에 금실의 패턴이 들어간 예복은 베니스 총독들이 공식 석상에서 착용한 정복인데, 교황의 의복과도 닮은 점이 적지 않다. 군주의 위엄과 권능을 드러내 보이는 그의 의복은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고 정교하되 현란하지 않다.
그림은 당대 베니스 출신 최고의 화가로 명성을 날린 조반니 벨리니(1435?~1516)의 작품이다. 그가 이 초상화를 제작할 때의 나이가 71세였다. 은퇴해서 손자들 재롱을 즐겨도 좋을 나이에 이처럼 뛰어난 작품을 그렸으니 그 노익장이 부러울 정도다. 벨리니는 인물 표정의 모든 섬세한 디테일을 포착했을 뿐 아니라, 모자를 두른 띠 속의 기하학적 문양, 예복 표면의 금실 패턴까지 거의 실오라기 하나 놓치지 않고 묘사했는데, 그 세밀함은 거장의 원숙함과 함께 장인적인 근면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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