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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예술

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by 트렌디한 일반 상식 2023.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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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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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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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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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김종필, 한국, 화가, 1926-2018

나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아마추어적 유유자적(悠悠自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눈에 비치는 사물의 상(象)을 그저 재현해 보기 위한 것도 아니다. 나에게 그림은 인생 여정(人生旅程)과 같다. 내 그림 곳곳에 지나온 세월의 격정과 고뇌가 녹아 있다.

 

내가 미국 대학에 보낸 그림이 두 점 있다. 하나는 1984년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대에 보낸 ‘주먹(Fist·1984)’이라는 유화다. 2호(25.8 ×17.9㎝) 짜리 조그만 화폭에 가득 내 주먹을 그려 넣었다. ‘힘을 수반하지 못한 정의는 무기력하고, 정의를 수반하지 못한 힘은 폭력일 뿐’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사람이 태어날 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온다. 갓난아기의 손을 펴보면 손바닥에 손금을 따라 때가 새까맣게 묻어 있다. 그 정도로 주먹을 꼭 쥐고 나온 거다. 이건 바로 아기가 엄마 배 속을 힘겹게 빠져나오면서 살아야겠다는 본능적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사람은 슬플 때 주먹을 쥐고서 울고, 결의를 표명할 때에도 주먹을 쥔다. 이 주먹이 인생의 속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된다.

 

또 다른 그림은 미주리주 풀턴의 웨스트민스터대 전시관에 있는 ‘봉산탈춤’(116.8 ×91㎝·1977)이다. 66년 10월 나는 웨스트민스터대에서 명예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1200여 명을 수용하는 대강당에서 1시간 동안 ‘자유를 향한 아시아의 길’이란 제목으로 영어 강연을 했다. 웨스트민스터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년 만인 46년 3월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1874~1965) 전 총리가 그 유명한 ‘철의 장막(iron curtain)’ 연설을 한 곳이다.

 

웨스트민스터대학은 처칠 연설 20주년을 기념해 나를 강연에 초청했다. 나는 처칠이 연설한 바로 그 강단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중국의 임어당(林語堂)에 이어 두 번째로 강연을 했다. “동서양은 죽(竹)의 장막을 제거하고 문화적으로 손을 잡지 않고서는 세계 평화를 이룩하기 어렵다”는 게 나의 연설 요지였다. 웨스트민스터대에서 나에게 “그림을 그린다고 들었으니 한 작품을 보내달라”라고 했다. 그래서 보내 준 게 ‘봉산탈춤’이다. 나는 그 그림에 대해 ‘과거 한국 사람들은 맨 얼굴로는 못하니 이런 탈을 쓰고 권세를 비판했다.

 

그림 속에는 권력을 향한 조용한 반항과 해학(諧謔), 그리고 위정자들에게 뉘우침을 요구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설명해 줬다. 지금 이 그림은 대학 전시실에 처칠 및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 전 미국 대통령의 그림과 나란히 전시돼 있다.

 

처칠도 그림을 즐겨 그렸다. 그는 회고록에서 “내가 천국에 가면 첫 백만 년의 시간 대부분을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의 밑바닥(the bottom of the subject)에까지 도달할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 평생 500여 점의 그림을 남긴 그는 선명한 색채를 그렇게도 좋아했다. 푸른 나무가 우거진 사이를 뚫고 태양이 땅을 훤하게 비추는 그림을 처칠이 좋아했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게 된 것도 그 다운 동기에서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해군장관에서 실각한 마흔 살의 처칠은 번뇌의 마음을 이겨낼 필요가 있었다. 처칠은 “그림은 어려운 시기에 나의 구원자였다”라고 말했다. 처칠이 처음 캔버스를 들고 공원에 나섰을 때다. 그는 캔버스를 세워놓고 무엇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몰라 우거진 수목 사이로 창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귀부인이 부드럽고 상냥하게 이 초심자를 지도하게 된다. 이 귀부인이 바로 처칠이 사사한 하젤 래버리(1886~1935)였다. 그녀는 당대 화단의 거장 존 래버리(1856~1941) 경(卿)의 부인으로, 역시 그림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 우연은 엉뚱하게도 이렇게 천재를 발굴해 내는 모양이다.

 

나도 정계를 잠시 떠났던 68년 마흔두 살 때부터 그림을 시작했다. 부산과 제주도·경주·설악산·강릉 등지를 다니며 일요화가회 회원들과 그림을 그렸다. 물론 내가 처칠 흉내를 낸 것은 아니다. 당시 일요화가 회원들의 요청으로 명예회장이 되면서 ‘기왕이면 직접 그려볼까’ 하는 충동에 유화 붓을 들게 됐다.

 

어려서부터 비교적 취미가 다양해서 그림도 퍽 좋아했다. 하지만 중학 시절에 수채화를 그려본 후로는 붓을 잡아보지 못했다. 캔버스를 처음 대했을 때는 정말 당혹스러웠다. 다행히 화단의 거장(巨匠) 이마동 1906~80) 홍익대 교수나 박광진(80) 서울교대 교수의 지도로 몇 점을 그리는 동안 기초적인 필치를 익혔다.

 

68년 8월 경주 반월성에서 석빙고(石氷庫·53 ×45.5㎝·1968)를 그리고 있었다. 나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이마동·박광진 교수 등 쟁쟁한 선생들이 같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 버스 한 대가 부근에 섰다. 수학여행을 온 이화여대생들이었다. 이들은 버스에서 내려 우리 일행 쪽으로 와 기웃거리더니 내 그림을 보고는 큰 소리로 품평을 했다. “얘, 가운데 있는 사람이 제일 형편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나와 교수들이 같이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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