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위기의 끝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다. 지난 3년여간 위기의 한복판에 있었을 때로부터 태세 전환이 필요하다. 왜 변해야 하는가에 대한 설득은 경험적으로 끝났다. 이제는 조직의 민첩한 대응력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 다만 조급증은 금물이다. 디지털 및 데이터 관련 대규모 투자는 시작부터 골칫거리로 여겨진다. 어떻게 쓸지에 대한 고민 없이 무턱대고 구축하고 쌓은 디지털과 데이터 환경은 이미 애물단지가 돼 가고 있다.
하지만 데이터는 데이터 과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조직의 모든 구성원이 좋은 ‘판단’을 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재료이다. 사람의 몸에 피가 잘 흐르는 것이 중요하듯 데이터 또한 조직 전반에 잘 흘러야 한다. 그래서 사람, 돈, 기술처럼 데이터를 필수불가결한 전략적 자산으로 인식하고 활용하는 조직을 바로 ‘데이터가 흐르는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데이터가 흐르는 조직을 만드는 데 필요한 4가지 균형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1. 문제와 데이터의 균형
우리는 데이터 과학을 지나치게 공학적이고 기법적으로만 이해하면서 목적의식을 잃어버렸다. 여기서 목적의식이란 모든 데이터 활용은 반드시 ‘문제해결’을 지향하고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말한다. 이로 인한 비효율성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리더가 데이터로 풀 수 없는 문제를 풀기를 직원들에게 강요하는가 하면 수백억짜리 스마트 팩토리 프로젝트가 명확한 목적 없이 진행되기도 한다. 이게 다 “어떤 문제를 풀 것인가?”라는 질문에 천착하지 않고 데이터의 양에만 집착하는 관성에서 생긴 해프닝이라고 볼 수 있다.
데이터의 ‘필요성’은 상상에서 나오지 않고 ‘문제해결’ 과정에서 가장 명료해진다. 특히 필요한 데이터를 정의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럴싸한 목록을 적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데이터는 구체적 형식까지 정의돼야 비로소 분석의 재료가 될 수 있다.
나아가 데이터 전문가 조직은 굳이 데이터 분석가들로 구성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현업의 문제를 더 잘 이해하는 전문가와 데이터 분석을 지원하는 데이터 엔지니어들로 구성하는 게 나을 수 있다. 현재 국내의 아주 극소수 기업에서 이렇게 데이터 분석가가 없는 데이터 전문 조직이 태동하고 있다. 데이터 교육이 실제 실무 문제에 기반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데이터 기반 혁신을 이제 막 시작하는 모든 기업이 이런 고도화된 역할 구조를 처음부터 갖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균형감을 놓치지 않기 위한 방안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2. 실험과 분석의 균형: 실험 기획의 중요성
기업들의 데이터 관련 고민을 많이 접하다 보면 생각보다 자주 접하는 불균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많은 사람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분석이 필요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실험과 분석의 불균형’이다. 굳이 데이터 분석으로 풀 문제가 아닌 것도 데이터로 풀어야 한다는 강박 탓이다.
공공 영역이건, 민간 영역이건 현재 보유하고 있는 데이터의 대부분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쌓은 것은 아니라는 한계가 있다. 이런 거대한 제약 조건을 간과하면 문제해결의 다양한 방법을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오로지 “데이터 분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질 수 있다. 문제를 잘 살펴보면 꼭 과거 데이터 분석을 기반으로 추론해 판단하지 않아도 1) 의사결정자의 결단, 2) 프로세스 개선, 3) 디지털 솔루션 도입, 4) 정책 및 제도 개선으로 풀 수 있는 문제도 많다. 데이터는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에 데이터 분석의 효과는 과거 사건의 특성이 미래 사건의 의사결정에 활용될 수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
즉, 경험해 보지 못한 사실을 판단하려 하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정보가 부족해 판단이 안 되던 게 아니라면 원천적으로 ‘데이터 기반 문제해결’이 힘을 발휘할 영역이 아닌 것이다. 새로운 의사결정에 맞는 새로운 실험을 기획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분석만큼이나 막강한 문제해결 방안이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3. 심층 데이터와 피상적 데이터의 균형: 아날로그 조직의 중요성
실험과 분석의 균형이 필요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지금 보유하고 있는 데이터가 지금의 의사결정에 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막연히 빅데이터에 의존하지 말고 작은 양이더라도 새로운 데이터를 쌓으면서 의사결정을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데이터를 잘 쌓을 수 있을까?
데이터가 추론 모델을 완성하는 데 좋은 재료가 되려면 핵심적으로 ‘심층적 데이터와 피상적 데이터의 균형’이 필요하다. 심층적 데이터란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데이터, 피상적 데이터는 결과를 모아 놓은 데이터라고 이해하면 쉽다. 데이터 과학은 결국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을 기초로 한다. 이때 상황을 통제한다는 것은 인과관계를 통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인과를 추론한다는 것은 비단 사회과학뿐 아니라 자연과학에서조차도 쉽지 않은 도전이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 상관관계인데 상관관계가 인과관계 대비 가진 핸디캡을 극복하려면 ‘매우 많이 관찰한 양’, 즉 빅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래서 빅데이터가 인간의 의사결정 방법에 근본적인 변화를 준 게 있다면 (어렵게) 인과 추론을 하지 않아도 관찰의 양을 극대로 늘려 상관관계만으로도 좋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빅데이터는 사건의 원인에 대한 기술이라기보다는 결과만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과연 우리가 언제까지 좋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해봐야 한다. 알다시피 빅데이터를 모으고 관리하고 분석하는 데는 굉장히 많은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 무작정 많은 데이터가 좋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원인을 과감히 유추할 수 있는 잘 기획된 데이터의 존재가 더 절실하다. 심층과 피상적 데이터의 균형이 필요한 이유다.
4. 역량과 권한의 균형: 경영 체계 혁신의 중요성
마지막으로 꼭 강조하고 싶은 균형은 데이터 분석 역량과 의사결정 권한의 균형이다. 데이터 혁신 조직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조직 내 의사결정 구조 관점에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는 하나의 분석 기법을 이해하고 기존에 하지 못했던 문제를 하나 해결했다는 프로젝트 관점과 다르다. 데이터가 의사결정 문화 자체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많은 기업이 구성원 개개인의 역량 개발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지만 실제 그 역량을 쓸 수 있도록 의사결정 구조를 바꾸는 일에는 인색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가속화되면 당연히 디지털 환경의 수준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디지털이 ‘데이터의 엄마’라고 봤을 때 데이터 역시 증가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현장에서 데이터가 쌓인다는 것이다. 즉, 정보가 특정 부서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장 곳곳에 쌓인다는 말이다. 데이터가 쌓이는 현장 곳곳에서 데이터 분석이 일어나고, 그 결과에 따른 문제해결의 의지가 발생할 때 데이터는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데이터를 쌓는 자’ ‘데이터를 분석하는 자’ ‘분석 결과로 문제해결을 시도하는 자’가 동일 인물일수록 강력한 힘이 발휘된다는 얘기다. 여기서 데이터 혁신 조직의 핵심은 구성원 개개인의 분석 역량보다 의사결정 구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대로 데이터 과학은 인간의 ‘판단’을 다룬다는 관점에서 여느 4차 산업혁명 기술 요소와 그 근본 성격이 분명 다르다. ‘양자 컴퓨팅 도입을 위한 조직 문화 개선’이라는 말은 없어도 ‘좋은 분석가가 많아도 좋은 분석 문화를 가진 회사는 적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가뜩이나 복잡하고 어려운 데이터 과학인데 심리적, 경영적 이해까지 더해야 한다는 것이 불편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의사결정의 속도와 정확성을 동시에 올려야 이전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시대에 진입할 수 있다. 좀 더 종합적이고 거시적인 균형감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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