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에 하루만 머물러야 한다면, 우피치 다음으로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가 볼 것을 추천한다. ‘아카데미아’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원래 18세기말 합스부르크 왕가의 토스카나 공 레오폴드(후에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드 2세)가 설립한 왕립 미술원이었다. 이 오래된 미술 교육 건물이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올라서게 된 계기는 1873년 피렌체시가 <다비드상>의 전시관으로 이 건물을 선정한 덕분이다. 그때까지 거의 500년 가까이 시뇨리아 광장에서 풍찬노숙하던 <다비드상>을 위해 이후 장장 9년에 걸쳐 전시관 건설을 마무리하고 1882년 공식 개장했다. 그 후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전 세계에서 방문객을 불러들이는, 특히 미켈란젤로의 팬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성지가 되었다.
전무후무한 조각 - <다비드상>
내가 이 조각을 마주한 것은 피렌체 체류 3일째 늦은 오후였다. 일단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다비드상>은 그 규모부터 남달랐다. 흔히 책에 나오는 사진으로는 그 규모를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현장에 가면 이미 먼발치에서부터 입이 떡 벌어진다. 크기만 보면 성서의 영웅 소년 다윗보다 그가 제압한 블레셋군의 거인 전사 골리앗을 닮았다. 물론 골리앗이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면 아무리 거인이었다고 해도 인간인 이상 신장이 3미터를 넘지는 못했을 테니, <다비드상>은 그보다도 거의 두 배에 달한다.
물결치는 풍성한 곱슬머리, 부리부리한 눈, 오뚝한 콧날뿐 아니라 강인한 팔, 흉곽, 다리 등은 그리스ㆍ로마 신화 속의 남신, 영웅을 방불케 하는 포스를 풍긴다. 손등을 흐르는 힘줄, 발가락과 발톱의 배치, 성기 위에 돋은 음모에 이르기까지 극사실주의적인 묘사는 경이로울 지경이다. 다비드는 뻣뻣한 차렷 자세 대신 오른쪽으로 몸의 무게 중심을 약간 옮긴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흔히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라는 용어로 불리는 이 포즈는 조각이나 회화 속 인물이 마치 한 동작에서 다른 동작으로 옮겨 가는 사이의 짧은 순간을 포착한 듯이 실재감을 부여한다. 또한 다비드의 오른발을 감싸고 있는 듯한 나무 둥치(그런 모양의 돌출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한 덩이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인 다비드상의 무게 중심이 오른쪽으로 옮겨 간 것을 지지하기 위한 역학적 고려라 할 수 있다.
조각의 체형은 자연스러운 인체 비율을 따르고 있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대두에 팔과 다리는 긴 편인데, 이는 실수가 아니라 의도한 결과다. 애초에 <다비드상>은 당시로는 고층 빌딩에 속하는 두오모 성당의 돔 둘레에 장식으로 설치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아래에서 우러러 볼 때에 마치 같은 고도에서 대상을 보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착시 효과를 고려해서 조각을 만든 것이다. 이는 다빈치가 <수태고지>에서 관람자들이 올려다볼 위치를 고려하여 성모 마리아의 신체 일부를 과장되게 묘사해야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1501년 피렌체의 유력 인사들이 두오모 성당 외벽을 장식할 대규모 조각의 제작을 의뢰했을 때 미켈란젤로는 26세였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매우 파격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알고 보면 그리 무리한 선택도 아니다. 소년 시절 일찌감치 로렌초 메디치에게 일종의 미술 장학생으로 발탁되는 특혜를 누렸던 미켈란젤로는 이미 10대 시절부터 메디치 가문 인사들에게 의뢰를 받아 여러 조각을 만들어 왔고, 15세기가 저물 즈음 그의 명성은 피렌체 너머 전 이탈리아에 퍼져 있었다.
<다비드상>의 조각가로 미켈란젤로가 아니면 안 되었던 사정은 또 있었다. 조각의 원자재가 된 것은 1460년대 카라라산에서 채석된 초대형 대리석 석재였다. 그런데 두오모 성당 조각 작업을 맡은 조각가마다 대리석 표면을 몇 번 긁적거리다가 작업을 포기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그 거대한 돌덩이가 거의 수십 년간 성당 구내에 흉물처럼 방치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최근에 밝혀진 연구 결과에 따르면 문제의 대리석은 돌의 밀도가 유달리 강해서 부딪히는 도구에 대한 저항도가 높은 탓에 조각가가 원하는 모양으로 깎아 내기가 까다로웠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친 돌을 다룰 수 있을 만큼 젊고 힘이 넘치는 동시에 미적 감각까지 겸비한 예술가가 필요했고, 이 조건을 충족할 만한 인물은 당시 이탈리아 전역과 유럽을 통틀어 미켈란젤로뿐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조각술에 대해 언젠가 “대리석 속에 천사가 갇혀 있기에 돌을 파서 그를 해방시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얼핏 간단하게 들리지만 정작 미켈란젤로가 돌 속에 갇힌 다비드를 자유롭게 하는 데는 3년이 걸렸다. 작업 기간 내내 미켈란젤로의 용모는 마치 제빵사에 가까웠다고 알려져 있다. 제빵사가 종일 밀가루 더미를 온몸에 묻히고 다니듯이 미켈란젤로 역시 작업 중 부서진 돌가루, 그 부스러기를 몸에 덮어쓰고 지냈기 때문이다.
완성된 조각의 실물을 본 피렌체의 원로들은 미켈란젤로에게 작업을 의뢰했을 당시의 계획을 변경하여 <다비드상>을 두오모 성당 대신 도시의 공공 기관들이 대거 집결해 있는 시뇨리아 광장의 베키오 궁전 바로 앞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 엄청난 규모의 조각을 성당 외벽 위에 올리는 작업에 부담이 작용한 이유가 컸겠지만, 동시에 <다비드상>이 ‘단지’ 성당 건물의 들러리로 이용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걸작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쉽게 직감했을 것이다.
실제로 <다비드상>은 예술품의 전통적 기능 자체를 바꿔 놓은 혁신적인 케이스였다. <다비드상>의 애초 기획 의도가 시사하듯 당시까지 서구 문화에서 조각이란 교회, 궁전, 대저택 등의 공간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상>을 통해 조각의 그런 종속적 기능을 거부하고 조각이 조각 자체로서 감상되고 평가받는 새로운 차원을 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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