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철학의 최대 화두의 하나는 언어다. 그런데 그것은 철학사적으로 육체[몸]의 발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육체의 발견이 있었다는 것은 철학함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간에게서 본질적인 것이라 여겨졌던 모든 것이 다 육체 안에서 육체가 주도해서 벌이는 활동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관점이 자리를 잡는다. 무시간적, 초역사적 절대 주체가 있어서 역사와 시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에게 두루 통하는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내던져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시간의 흔적이 담긴 진리의 형태를 자신들의 유한한 표현수단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전해줄 뿐이다.
근대의 인식론적 사유 틀에서는 초월론적 [선험적] 주체 또는 자아가 핵심개념의 자리에 있었다. 여기에서 “초월론적”은 “대상을 구성하는”이라는 의미를 띄고 있으며 “초월[선험] 철학”은 “대상의 경험과 인식을 가능케 하는 조건에 대해 탐구하는 철학”을 의미한다. 주체는 대상인식에서 더 이상 그저 사물을 마주하여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자료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인식의 그물망을 던져 대상을 건져 올린다. 범주라는 인식의 틀을 갖고서 대상을 구성한다.
이렇게 능동적으로 대상을 구성하는 주체를 우리는 ‘초월론적 자아’라고 이름한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대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가 대상을 덮친다. 초월론적인 주체에서는 인간의 능동성이 매우 강조된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 사유태도는 자연에 대한 정복자적인 태도, 식민지 정책, 끊임없는 정보의 축적에 의한 대상의 소유와 지배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초월론적 자아가 육체의 발견으로 인해 신체를 가진 유한한 주체 내지는 자아로 변한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하나의 절대적인 주체를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육체의 수만큼이나 많은 주체를 상정해야 하며 이제는 그러한 주체 사이의 교통이 철학에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주체는 이제 ‘상호주관성’의 관점 아래에서 그 타당성을 입증해야 한다. 하나의 주체, 하나의 자아를 이야기할 때에는 그 밑바탕에 모든 사람이 하나의 세계 안에서 똑같은 이성의 능력을 갖고 하나의 문화를 형성해 나가며, 불편 없이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여 하나의 진리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고 있다.
19세기 들어서면서 서양인들은 유럽과는 다른 문화권을 알게 되고 거기에서는 유럽과는 다른 언어와 사유방식, 생활양식이 펼쳐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문화적으로 뒤진 다른 문화권을 선교사적인 자세로 계몽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러다 유럽 내에서도 문화적인 차이에 따라서 인식의 틀이 조금씩이나마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절대적인 주체에 대한 회의가 커가기 시작한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철학자들은 더 이상 하나의 절대 주체를 상정할 수 없음을 절감한다. 주체가 여럿임을 인정 안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현대에서는 상호주체가 중요한 철학의 문제로 급부상하게 된다.
근대에서 ‘사유하는 홀로-주체’가 철학적으로 모든 것을 주도해 나갔다면 현대에 와서는 그 자리를 신체를 가진 주체들인 ‘말하는 [의사소통하는] 서로-주체’가 떠맡게 된다. 사유하는 홀로 주체에서처럼 정신적인 측면만 강조하면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것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구체적인 생활세계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역사를 일구어내며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의 생생한 삶의 경험은 배제된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구체성, 신체성이 논의의 장 안으로 들어오면 그 신체들이 열어주는 다양한 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는 하나의 주체만을 생각하는 것은 힘들게 된다. 이렇게 주체가 초월론적인 자아에서 신체적인 자아로 바뀌게 되면 지금까지처럼 주체가 세계를 구성한다고 얘기할 수 없게 되고 오히려 구성되는 것은 주체라고 말해져야 된다.
절대적인 주체가 이제는 구성된 주체가 된다. 지금까지는 주체가 대상을 구성한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사물이, 환경이, 문화가, 사회가 주체를 구성한다고 해야 한다. 개인의 오만이 극에 이르렀었지만 알고 보니 개인이란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가련한 존재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주체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단계에까지 오게 된다.
초월론적 자아와 같은 절대 주체란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조종하고 있는 그런 “주체”를 상정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일종의 권력이며 무의식이다. 인간은 거시권력에 의해서 뿐 아니라 미시권력에 의해서 조종되고 통제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도 보이지 않게 조종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의 욕망, 본능 등이 이미 무언가에 의해서 프로그래밍되고 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 무언가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다.
절대중심, 절대주체가 해체되며 대두되는 것은 자연히 다중심, 다극화, 다원화다. 이제는 하나의 주체가 아닌 여러 개의 주체를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문화다원주의시대를 살고 있다. 이것이 20세기의 문화적인 배경이다. 20세기말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흐름이 등장하여 인간중심, 이성[로고스] 중심을 해체하고 새로운 사유의 패러다임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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