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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New Art Gallery

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by MINGFORMATION 2023.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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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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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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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김종학, 한국, 설악의 화가, 1937~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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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 화가는 야생화들처럼 추운 무명시절을 이겨내고 ‘한국의 피카소’라는 별명을 얻으며 한국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로 그의 작품들은 한때 투자가치 1순위에 오르기도 했다. 어느 날 봄에 죽으려고 폭포 위에 섰다가 우연히 산중에 핀 할미꽃을 보게 됐고 그때의 할미꽃이 너무 아름다워 남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살면서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는 김종학 화가는 무명시절이 길었던 자신의 가장 절박했던 순간에 눈에 들어온 것이 설악산이었고 그 설악산 속 추운 겨울을 이겨 내며 생명의 축제를 벌이는 야생화들을 보며 사람으로 인해 다친 마음을 치유하면서 그의 대표작 설악산과 꽃 그림을 탄생시켰다. 김종학 화가는 1937년 평안도 신의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전공했고 추상 표현주의 회화 운동인 악뛰엘 동인으로 화단 활동을 시작했으며, 1979년부터 설악산 입구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30년 이상 설악을 테마로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김종학 화가는 어느 날 봄에 죽으려고 폭포 위에 섰다가 우연히 산중에 핀 할미꽃을 보게 됐고, 그때의 할미꽃을 보며 ‘남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의 할미꽃이 너무 아름다워 그림에 담기 시작했다는 그는 자신의 길었던 무명시절만큼 절박했던 순간에 자신의 눈에 들어온 것이 설악산이었고 그 설악산 속 추운 겨울을 이겨내며 생명의 축제를 벌이는 야생화를 그리며 사람으로 인해 다친 마음을 치유했다. 그의 대표작 설악산과 꽃시리즈가 탄생된 순간이었다.

 

42세에 이른 1979년 가을 김종학은 설악산 입구에 친형이 마련해 준 별장에서 지낸다. 첫 3개월 동안은 아무도 만나지 않으며 고립된 생활을 이어 갔다. 화가로서, 가장으로서 모두 실패한 것 같은 자괴감에 자살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김종학은 ‘자식들이 자랑할 만한 좋은 작품 100점만 남기고 죽자’는 일념으로 소 외양간으로 지어진 시멘트 건물을 임시 화실로 개조했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고민하던 중 제멋대로 무질서하게 얽혀 있는 덩굴과 숲의 형상이 눈에 들었다. 그때부터 자연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자연의 질서와 균형, 조화에 집중했다. 꽃이 피면 꽃을 그리고, 계절이 바뀌면 계절을 따라 대상을 바꿨다.

 

김종학은 스스로 “자연을 마음대로 그린다”라고 말한다. 자연은 그림의 주요한 소재이긴 하지만 이를 있는 그대로 모방하여 그리지는 않는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화려한 채색으로 자연을 그린 회화를 발표하며 김종학 고유의 화풍을 정립하기 시작한다. 1982년 강원대학교에서 개최한 <교수 작품전>에서 선보인 작업은 잭슨 폴록의 작품 <푸른 기둥들>과 같이 화면을 하얀 기둥으로 분할하며 전통적인 수묵 수채화에서 과감하게 변주된 형식을 드러낸다. 1985년 원화랑에서 연 개인전은 한지에 여인과 꽃, 숲을 서정적으로 채색한 수채화 십여 점을 처음으로 선보인 자리였다. 김종학은 이 개인전을 통해 ‘색채 화가’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같은 해 <서울 미술 대전> <현대 미술 초대전> 그리고 두 손 갤러리가 개최한 그룹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은 카오스 같으면서 동시에 율동적인 자연의 모습을 담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크고 작은 전시를 통해 호의적 평가를 받았다. 유명 갤러리에서 열린 김종학 작가의 개인전은 늘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특히 2004년 갤러리 현대와 2006년 가나아트센터에서 연 개인전은 대작을 중심으로 <김종학 예술>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2001년 박여숙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는 설악의 아름다운 겨울과 봄을 그린 작품을 선보였다. “김종학의 최근작을 보면 이전의 작품에서 보이던 의식적 미의 파괴는 없다. 오히려 부분적으로 정리된 감정의 흐름이 조형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변모는 김종학의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와 미를 해석하는 힘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과거 일부러 나타냈던 거친 맛과 화면의 파괴를 정리하고, 또 하나의 미적 경지에 도달했다.” 미술 평론가 이경성은 김종학이 아름다움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의식적으로 부분적인 미를 파괴하고 보다 큰 하모니에 충실하게 따른다고 봤으며, 거기서 일어나는 미적 효과를 ‘다양의 통일’이라고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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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로운 색으로 피어난 꽃이 화폭을 가득 메우고, 사이사이 날아다니는 물총새, 나비, 딱따구리, 무당벌레 등 화려한 이미지들이 생동감을 더합니다. 원시적이고 강렬한 색깔들이 조화를 이루고, 거칠게 휘두른 붓질에서 화려한 꽃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화가 김종학은, 경기 중학교와 고등학교, 서울대 미대, 일본과 미국 유학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이후의 삶은 무명 화가이고, 무능한 아버지에다 결혼생활마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치듯 설악으로 들어간 그는, 딸이 ‘화가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게 해 줄 좋은 그림 100장을 그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딸에게 편지도 썼습니다. "시시한 아빠로 비난받으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어. 100장을 그릴 때까지만 살자며 입술을 깨물고 꽃과 나비를 그렸단다." 눈앞에 펼쳐진 설악산의 절경을 그리면서 그는 구상화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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