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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예술

디에고 벨라스케스 (feat.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

by 트렌디한 일반 상식 2023.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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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 바로크의 거장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명암법으로 경건한 종교적 주제를 그렸으나 민중의 빈곤한 일상생활에도 관심이 많았다. 인물의 성격을 잘 표현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 하나이며, <시녀들>은 많은 토론거리를 남겼다.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17세기 스페인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로, 왕과 왕실 가족, 귀족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뛰어난 관찰력으로 자연과 인물, 현실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특히 인간의 심리를 표현하는 데 뛰어났다. 그는 당대에도 이름이 높은 화가로 화려한 생활을 하였고, 19세기 들어 회화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식되면서 더욱 명성을 떨쳤다. 인상주의자들은 그의 작품을 기점으로 회화가 순수 시각 미술로 전환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파블로 피카소는 그가 진정한 리얼리티를 구현한 화가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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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는 1599년 6월 6일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그는 포르투갈계 유태인 출신의 변호사였던 아버지 후안 로드리게스 데 실바와 스페인의 하급귀족 출신인 어머니 헤로니마 벨라스케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어머니의 혈통이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장남이 어머니의 성을 함께 쓰도록 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성을 따라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벨라스케스가 되었다. 벨라스케스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당시 이탈리아의 화풍을 거부했던 프란시스코 데 에레라에게서 미술을 배웠다. 12살이 되자, 벨라스케스는 에레라의 곁을 떠나 세비야의 예술가인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프란시스코 파체코는 알론소 카노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벨라스케스는 파체코의 지도로 5년 동안 미술을 공부하면서 세비야의 화풍을 배웠다. 파체코는 “성실성과 훌륭한 재능을 갖추고 있는 벨라스케스는 실물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모델의 자세를 스케치하기 때문에 인물 묘사에 뛰어나다.”라고 벨라스케스를 평했다. 스승인 파체코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1617년에 화가 길드에 가입하고, 일 년 뒤 스승의 딸인 후안나 파체코와 결혼했다.

 

벨라스케스는 초기부터 화가로서 실력이 완성되어 있었지만, 만족하지 않고 카라바조풍에서 전기 인상주의 양식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기법을 배우고 발전시켰다. 또한 그는 보데곤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는 정물을 모티브로 하여 일상의 주제를 다룬 양식으로 17세기 스페인의 회화에서 크게 유행된 양식이다. 그가 보데곤 양식을 사용하여 그린 그림으로는 <달걀부침을 만드는 노파>와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등이 대표적이다. 1622년 4월 초 그는 왕의 사제였던 돈 후안 데 폰세카의 추천서를 받아 마드리드로 가게 된다.

 

1622년 12월에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인 로드리고 데 비얀드라도가 죽자 벨라스케스가 궁정으로 들어와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1623년 8월 16일 드디어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 그는 단 하루 만에 왕의 초상화를 완성하였다. 단지 왕의 두상 부분을 그린 초상화였지만 왕과 다른 사람들 모두 그 그림에 만족했다. 이에 벨라스케스와 가족 모두 마드리드로 이사하라는 왕의 명을 받게 된다. 이사를 하는 조건은 벨라스케스 이외에 다른 어떤 화가도 왕의 초상을 그릴 수 없다는 것과 그가 그린 모든 그림은 궁정에 보관된다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624년 벨라스케스는 왕으로부터 비용을 받고 마드리드로 이사를 와 죽기 전까지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는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로 임명되며, 왕의 전속 초상화가가 되어 왕과 왕의 가족들을 그린다.

 

벨라스케스는 이 시기 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시녀들>이란 작품을 그린다. 이 그림은 총 3가지의 시선으로 그려져 있다. 첫째는 화가가 바라보는 시선, 둘째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공주의 시선, 셋째는 관람자의 시선이다. 벨라스케스가 이 그림을 그린 장소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오빠 방이었지만 그가 일찍 죽자 펠리페 4세가 벨라스케스의 화실로 꾸며준 방이다. 어린 공주는 왕과 왕비를 위문하려고 왔지만 왕과 왕비는 뒤에 멀리 있는 거울에 반사되어 나타나고 있다. 공주의 양옆에는 귀족 출신의 시녀가 있다. 한 명은 공주에게 물을 주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왕과 왕비에게 예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공주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난쟁이 광대가 있다. 맨 뒤에 그려진 문을 열고 나가는 사람은 궁정의 기사 겸 집사이다. 이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걸작이자 역작으로 고전 시대 전체를 압도하는 백미라고 극찬을 받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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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는 궁정에 머무는 동안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가 그린 <바쿠스의 승리>와 <술주정꾼들> 같은 작품에는 미묘하게 변화하는 빛의 뉘앙스가 표현되어 있다. 또한 보다 장식적이고 화려한 채색 기법을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루벤스와 티치아노의 화풍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 특유의 사실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접근 방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뿐만 아니라 왕실의 수석 집사 역할까지 맡아 축제와 관련된 일들을 집행하면서 왕실의 생활 전반에 관여했다. 그런 한편 그는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거울을 보는 비너스> 등 많은 그림도 그렸다. 이때 그린 그림들은 티치아노를 연상시키는 섬세한 붓놀림과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들이 벨라스케스 특유의 사실적인 묘사 방식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벨라스케스는 1660년 마리아 테레사 공주와 루이 14세의 결혼식 장식 담당자로 스페인과 프랑스의 접경에 있는 푸엔테라비아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고 마드리드로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벨라스케스는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알카사르에 안치되었다가 많은 왕실 가족과 귀족들의 추도 아래 성대한 장례가 치러졌으며, 산 후안바우티스타 성당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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