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붓과 펜을 든 할머니 작가들. 그 끝에 놓인 세상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
김두엽
2016년, 아들과 함께 광양문화예술회관에서 첫 전시를 연 후 지금까지 열 번이 넘는 전시에 참여했습니다. 지난해 광양에 작은 갤러리를 열었고, 그림 에세이 〈그림 그리는 할머니 김두엽입니다〉와 나태주 시인과 함께 시화집 〈지금처럼 그렇게〉를 펴냈습니다.
정선늠
88세 정선늠 할머니의 그림은 시골집 툇마루에서 북 찢어낸 달력 한 장과 모나미 볼펜 한 자루로 영글었습니다. 한평생 햇살 아래 풀꽃과 나무, 밭을 가꾸며 살아온 할머니는 식물이 지닌 생명력과 순수함을 선연한 색채로 그리며, 종이 위에 또 다른 밭을 가꿔나갑니다.
(故) 조무준
고(故) 조무준(1925~2018) 할머니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이토록 다채롭고 아름다웠던 모양입니다. 70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93세에 타계하기까지 4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어린 나이에 타지로 시집가 늘 고향 산천을 그리워하던 할머니는 딸이 우연히 건넨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로 애틋한 기억 속 세상을 구현했습니다.
오경춘
따뜻한 색연필 그림과 맑은 수채화 작품으로 엮인 오경춘 작가의 그림에는 그가 생애를 통해 지켜본 제주도의 사계와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이 담깁니다. 제주도 방언으로 ‘끄적이다’ ‘낙서한다’는 의미를 가진 〈엥기리다〉라는 제목의 전시를 진행하고, 책을 펴냈습니다.
정맹순
올해 81세인 정맹순 작가의 일과는 아파트 베란다에 찾아온 새들을 챙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수원에서 ‘탐조책방’을 운영하며 생태문화기획자이기도 한 딸 박임자가 카메라로 찍은 새 사진을 토대로 새를 그리기 시작하게 된 것은 심장 수술 후유증을 극복한 2019년의 일. 이후 아파트 단지를 찾는 새들을 직접 만나러 다니기도 하며 그린 300여 점의 새 그림은 달력이 되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동네 도서관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세상에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김성일
올해 76세인 김성일 할머니는 남편과 어머니의 죽음 이후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년 넘게 꽃과 어릴 적 추억을 그려왔습니다. 딸이 반려묘 향이를 키우기 시작한 6년 전부터 고양이에게 빠져 이젠 고양이를 가장 즐겨 그립니다.
박옥순
대전에 거주하는 84세 박옥순 할머니의 그림은 소박하지만 아이처럼 순수한 풍경으로 가득합니다. 할머니의 그림은 손녀 김자현이 우연히 사다 준 컬러링 북에 색을 덧입히며 시작됐습니다. 밤에는 술 없이 잠들지 못하고, 외로움으로 가득 찬 시기를 극복하게 한 힘은 그림이었다고요.
무엇이든 처음 시작이 있고, 하다 보면 어느 곳에 도달하듯 그림 또한 붓을 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시작을 가능케 하는 동기는 저마다 다르나 그 행동의 본질은 같다. 할머니 작가들의 그림과 이야기를 보고 듣다 보면 오래도록 망설여왔던 무언가 시작할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위 작가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의 그림과 삶을 대하는 자세를 통해 시작하기에 늦은 때란 없고, 어쩌면 당신의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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