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심리적 거대함(Psychological Bigness)
몇 년 전 조직행동론 강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리더십이 주제였는데, 평소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학생들에게 A4 용지 한 장씩 나눠주고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리더와 팔로워의 관계를 그림으로 표현해 보라고 했습니다.
57명의 학생들이 그린 그림들은 아주 다양했습니다. 단순히 원형과 화살표로 그린 그림부터 리더가 팔로워를 떠 받치고 있는 모습, 리더가 손오공처럼 복제되어 팔로워 숫자에 맞춘 모습까지 여러 표현을 볼 수 있었습니다.
흥미롭게 강의실을 오가며 학생들이 표현한 그림을 보던 중, 눈에 띄는 점이 있었습니다. 2명을 제외한 55명의 그림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리더와 팔로워를 구분하기 위해 ‘크기’를 이용했다는 겁니다. 리더는 크게, 팔로워는 작게 표현한 거죠.
심지어 리더는 영어대문자 ‘L’로 표현하고, 팔로워는 소문자 ‘f’로 표현한 그림도 있었습니다. 그때 심리적 거대함(Psychological Bigness)이라는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간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학부 강의에서도 별로 다루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의 그림에서 이를 실제로 관찰하고 경험한 순간이었습니다.
2. 거대함을 마주한 순간, 팔로워는 말을 아낀다
심리적 거대함이란 팔로워의 마음속에 ‘리더는 큰 사람’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때문에 소통과 의사 결정 과정에서 도전적인 발언이나 의견 피력을 못하게 되어 양방향 소통에 큰 걸림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청하는 리더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나 심리적 거대함 현상이 존재한다면 팔로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기에 경청의 노력은 허사가 될 수 있습니다. 상호 작용이 어려우니 조화로운 의사 결정이 어려우며 리더 본인은 그런 의도가 없는데도 독단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게 돼버리는 경우도 생깁니다.
1997년 8월에 일어났던 대한항공의 괌 사고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착륙 직전 공항 바로 앞의 언덕인 니미츠 힐(Nimitz Hill)과 충돌해 추락한 사고입니다. 사후 조사와 분석을 통해 기상 불안, 괌 공항의 활공각 유도장치 고장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원인으로 밝혀졌는데, 이와 더불어 심리적 거대함도 한몫을 했습니다.
착륙 시도 전 비상 상황을 인지한 부기장이 두 번이나 착륙 포기를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기장의 즉각적 의사 결정으로 이어질 만큼 강한 건의가 아니었습니다. 다급함에서 나오는 혼잣말에 가까웠죠. 당시 조종실 안에서의 심리적 거대함 현상을 가늠하게 합니다. 민항기 조종사들은 기장이 명백히 잘못하고 있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부기장이라도 독단으로 조종권을 인수하도록 교육받고 있습니다. 하나 조종실에 심리적 거대함이 존재하는 한 그러한 교육은 무용지물이 돼버립니다.
3. 리더를 거대하게 만드는 요인
심리적 거대함 현상이 반드시 누구의 잘못으로 인해 야기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근원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 현상을 줄일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어떤 요소가 심리적 거대함을 유발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있습니다. 몇 가지를 꼽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막강한 파워를 암시하는 호칭의 지속적 이용
상대의 말을 끊거나 차단하는 대화 습관
조직 생활에서의 공적(Formal) 특성에 대한 강조
의사결정 권한의 집중
같은 직급이나 직책의 동료보다 너무 탁월한 능력
공공연한 비난이나 질책하는 행동의 누적
지나친 자신감
상대적으로 큰 사무실의 크기
물론 ‘저건 적절한 권위를 갖추기 위해 필요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요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몇 주 전 강조했던 것처럼 지금은 리더가 독단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는 시대가 아닙니다. 경험, 능력, 연륜이 부족한 팔로워라고 하더라도 그와의 양방향 소통이 필수인 시대입니다. 그래야만 미처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고, 비로소 가치 창조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심리적 거대함 현상을 감소시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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