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블리의 첫 타겟 고객은 꼭 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뛰어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고, 남들이 모르는 걸 알게 되면 자랑하고 싶어서 근질근질거리는 그런 사람들. 퍼블리는 '고급 컨텐츠', '지적(intellectual) 컨텐츠'를 표방하며 이런 사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전략 컨설팅과 투자 업계에서 일했던 사람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뭘 보고 왔는지,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도쿄 곳곳에 어떤 신기한 사업 아이템이 있는지 등등... 컨텐츠 탐식가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도 컨텐츠를 구매하고, 오프라인 행사에 참여하고, '이런 서비스가 더 잘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팀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지금의 퍼블리 멤버십과 커리어리를 서비스하는 회사였다면 애초에 합류하지 않았을 겁니다. 두 서비스의 방향성 설정에 깊게 관여한 제가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말일 수 있지만, 개인적 선호를 사업에 너무 많이 투영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라.
그런데 회사에 들어가서 보니, 제 눈에는 그 시장의 뚜렷한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냥 머리로만 추론한 게 아니라 구매 데이터를 분석하고, 구매자들을 직접 만나서 심층 인터뷰를 하고, 광고를 집행해 보면서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이 시장은 한계가 있다. 책을 읽는 것보다 사는 속도가 빠른 사람들, 두세 시간이면 읽을 텍스트 컨텐츠에 5만 원씩 비용을 턱턱 내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뭔가를 파는 시장은 벤처 스케일의 스타트업이 타겟할 만큼의 규모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그 고객들마저 '신선한 시도'에 돈을 내고 있는 거지, 지속적으로 구매를 해줄 가능성은 낮다.
데이터를 분석하는 사람도 저 혼자였고, 고객을 만나는 사람도 저 혼자였고, 광고를 집행하는 사람도 저 혼자였으니 이걸 팀에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고급 컨텐츠, 지적 컨텐츠에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공동창업자 두 사람을 설득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죠.
결국 저는 설득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굳이 제가 설득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시장이 명확하게 피드백을 주고 있었으니까요.
2015년과 2016년에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2017년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철저히 외면했고, 고급 컨텐츠의 정점이라고 할 만한 파이낸셜 타임즈(영국의 그 Financial Times. 들여오려고 엄청 공을 들였고, 돈도 많이 썼습니다.) 역시 소수의 매니아들만 좋아하는 컨텐츠였습니다.
5-6년 전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파이낸셜 타임즈 컨텐츠의 실패가 C레벨들이 시장을 직시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조금씩 큰 시장을 찾아나서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긴 글을 인내심 있게 읽고 그걸 잘 학습하는 데서 가치를 얻을 만한 사람들의 시장은 너무 작다. 기존의 퍼블리는 프로덕트에서 얘기하는 time to value(고객이 제품에서 가치를 얻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 짧은 호흡의 컨텐츠, 바로 써먹을 수 있도록 떠먹여 줘야 더 많은 고객이 이용하게 될 거다'
'엔터테인먼트 컨텐츠가 아닌 지식 컨텐츠에 사람들은 언제 쓰려고 할까? 먹고사니즘이 걸려 있을 때, 불안감을 해소하고 싶을 때 돈을 쓰려고 한다. 그럼 어떤 사람들이 가장 돈을 쓸 만한 동기가 클까? 직업에 대한 불안이 큰 사람들일 것이다. 사회 초년생들을 타겟하자'
이러면서 조금씩 고객 규모는 늘어났지만, 그야말로 조금씩이었습니다. 어느 순간엔가는 한계에 부딪혔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퍼블리 멤버십)가 타겟하는 고객은 '일을 더 잘하고 싶은 사람 & 꾸준히 정진하는 사람 & 능동적으로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 & 거기에 돈을 쓸 만큼 진심인 사람'의 교집합이구나.
한국 전체에 이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이 시장은 너무 작아서, 아무리 광고비를 쏟아부어도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라는 게 제가 퇴사하던 시점에 갖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저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분들도 있었습니다. 퍼블리는 충분히 매력적인 상품을 갖고 있다. 시장이 작은 게 아니라, 잘 못 팔고 있는 거다. 잘 팔면 충분히 클 수 있을 것이다.
아웃스탠딩 기사를 보니 제가 퇴사한 이듬해인 2021년에 광고선전비를 35억 원 썼더군요. 제가 있을 때 쓰던 금액의 거의 스무 배 가량이니, 아마도 C레벨은 시장이 충분히 크다는 데 베팅을 한 것 같습니다. (퇴사 후 내부 사정은 잘 모르니 조심스럽게만 추측해 봅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아는 것처럼... 퍼블리에서 일하면서 강하게 하게 된 생각은 '스타트업은 시장 크기가 거의 전부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퍼블리 전에 저는 쏘카에서 일했는데, 쏘카는 (구성원들이 엄청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쏘카존을 늘리는 대로 쑥쑥 성장했습니다. 그때는 하루에 몇억씩 매출이 나는 게 너무 당연했습니다. 차를 구매할 만큼의 경제력은 없지만 차를 타고 운전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젊은이들은 너무 많았고, 쏘카는 그런 욕망에 맞게 차를 공급해주기만 하면 됐습니다.
창업자인 김지만 대표가 물러난 후 들어온 경영진은 최대한 좋게 말해서 형편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런 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퍼블리에서는... 다들 정말 열심히 일했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충분히 뛰어난 역량을 가진 구성원들이었고, 좋은 방식으로 일하려고 애썼습니다. 조직 관리든, 가설을 설정하고 실험을 하는 것이든, 데이터 기반으로 일하는 것이든, 고객에 집중하는 것이든....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들이 다른 시장을 타겟하는 사업을 했으면 분명히 좋은 성과가 나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식 컨텐츠, 일하는 사람들, 성장을 원하는 사람들 같은 정체성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겠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의 관점이라서, 다른 의견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냥 좋은 학교만 나왔지 사업적 역량이 부족한 헛똑똑이들이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테고, 좋은 시장을 타겟하지 못한 것 자체가 역량이 부족한 증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테고...
어제 <‘쏘카 창업주’ 이재웅이 투자한 미디어 플랫폼 ‘얼룩소’ 파산 선고>라는 기사를 봤습니다. 퍼블리와 얼룩소의 공통점이라면 (쩐주가 동일인이라는 점 말고)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 당위 또는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갖고 사업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업이 성장하고 성공하려면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려야 하고, 그게 벤처 스케일의 사업이 되려면 큰 욕망을 건드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거 아닐까... 청와대 뉴미디어비서관, 네임드 언론인들이 좋은 미디어를 만들 수는 있어도, 좋은 '사업'은 시장이 만들어 주는 거니까요. 퍼블리 얘기로 시작해서 갑자기 얼룩소 디스로 마무리를 하는 것 같은데, 시장이 그만큼 중요한 것 같다는 얘기였습니다.
“When a great team meets a lousy market, market wins. When a lousy team meets a great market, market wins. When a great team meets a great market, something special happens.” 프로덕트 마켓 핏(Product Market Fit, PMF)이라는 말을 만든 Andy Rachleff의 말입니다. 퍼블리는 great team까지는 아니어도 good/solid team이었지만 lousy market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사업 > 경영' 카테고리의 다른 글
What We're Reading 뉴스레터 (feat. 퍼블리의 시작) (9) | 2024.10.02 |
---|---|
잘 나가는 브랜드들의 숏폼 활용법 (feat. 에이블리, CU 및 콜린스) (20) | 2024.09.28 |
롯데마트 슈퍼를 곁들인 올인사과 (feat. 마트, 슈퍼 거기에 롯데온) (6) | 2024.09.25 |
프로야구 천만관중 시대를 연건 고객경험 (feat. 30% 성장) (10) | 2024.09.25 |
사회가 죄악으로 간주 (feat. 산업에 유입된 자본의 양보다 실제 내재가치가 적은 경우) (1) | 2024.09.24 |
댓글